1924년 일본에 있던 왕세자 이은이 신년 하례를 위해 귀국했다. 볼모 성격으로 일본인과 결혼했던 왕세자는 얼마 뒤 바로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왕세자가 돌아갈 때 호위하고 봉사(奉仕)한 제원에게 차등을 두어 상금을 지급할 것을 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봉사의 어원은 관직에서 국민을 위해 일을 하는 것을 의미했다.

1910년 일제에 이해 강제 병합된 상황에서 관직이 아니더라도 국가와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사회봉사라는 단어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1년 조선일보 1면에 “근래에 사회봉사라는 말이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어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식민지배 상황에서 벼슬에 오르지 않고 지역에서 교육 활동과 아픈 병자를 돌보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를 봉사로 생각한 것이다.

조선 후기 서양의학에 대한 간헐적인 접촉이 있었으나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면서 서구학문에 대한 경계가 증가해 국내 의료계는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1900년 의사규칙을 만들어서 현대적 개념의 의료인 양성을 계획했으나, 1910년 강제병합으로 제대로 실현되지 못한 채 좌절됐다. 일제는 고급학문을 조선인에게 알려주는 것에 적극적이지 않았는데, 의학 역시 그 중 하나였다. 그 결과 현대의학 교육을 받은 의사가 부족했다. 지방은 기초 해부학, 병리학을 한의사에게 가르쳐 의생이라는 이름으로 담당하게 했다. 일본의 경우 1868년 메이지유신 이후 의학교육을 현대적으로 바꾸면서 한의사들에게 현대의학 교육과 시험을 통해 1899년까지 4만명이 넘는 의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현대의학으로 전환된 일본과 달리 조선은 의사인력이 부족했고, 한의사들 역시 식민지배 시대에 현대의학으로 전환하는 데 대해 거부감이 남아 있어 적극적이지 않아 전국적인 의사 부족 현상은 지속됐다.

해방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은 부족한 의료시설의 80% 이상 파괴되었고, 얼마 안 되는 의료진들도 큰 피해를 입는 재난이었다. 휴전 이후 폐허가 된 의료시설을 복구하고 의료진들이 다시 진료 현장에 복귀했으나, 전국적인 의료시설 부족과 무의촌 상황은 무면허 의사들과 불법적인 약종상들이 범람하는 계기가 됐다. 1955년 용인 전체 의원은 12개에 불과했고, 5개 면에는 의료기관이 전무한 무의면이었다. 해외에서 한국으로 의료봉사를 오는 의료진, 국내 대학병원, 의사회 등이 해당 무의면에 방문해 의료 공백을 메우는 상황이었다.

1960년 700개 가까운 무의면은 보건의료에 있어서 시급한 문제로 간주됐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군사정부는 무의촌을 방치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의사인력을 강제 동원했다. 종합병원에 수련의들을 6개월씩 무의면에 근무하도록 강요했는데, 3년 동안 990명이 배치됐다. 수련의들을 활용한 무의촌 대책은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시행됐기에 동원된 의사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아무런 설비 없이 의사들만 있다고 해서 수술 등 고난이도의 진료가 이뤄질 있는 것도 아니고, 무의촌 지역주민들도 잠시 근무하는 의료진을 선호하지 않아 인근 마을에서 진료를 계속 받았기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폐지됐다.

의대생들에게 공중보건장학금을 주고 해당기간 만큼 무의촌 지역에 근무하게 하는 공중보건장학생 제도도 시행됐으나 호응이 없어 폐지됐다. 공중보건장학제도는 2019년 문재인 정부에서 다시 부활됐지만 여전히 호응은 낮은 상황이다. 여러 시도를 했으나 무의촌 문제는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무의촌 지역이 의료기관 뿐 아니라 도로, 전기시설 등 전반적인 사회지원 설비가 부족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1977년 의대 졸업생들에게 군의관과 함께 공중보건의사로 군복무를 대체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면서 무의촌 문제가 해결되기 시작했다. 1983년 경상남도 창녕군 도천면에 공중보건의사가 배치되면서 공식적으로 무의촌 지역은 사라졌다.

1970년대와 1980년대는 무의촌 지역에 의료봉사가 활발하게 이뤄졌다. 농촌활동과 더불어 의료봉사는 대학생으로서 해야 할 사회적 역할로 생각됐다. 1987년 민주화운동으로 6공화국이 출범했고, 88서울올림픽과 2002월드컵을 지나면서 국내 의료수준이 향상됐고, 무의촌지역도 사라지면서 의료봉사의 초점은 외국인 근로자와 사회적 약자로 전환됐다. 봉사의 범위도 넓어져서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에서 해외 의료봉사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가 수단으로 출국한 해가 2001년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은 좋은 장점만 있을 줄 알았지만 예측하지 못하는 부작용도 발견됐다. 전문적인 의료 활동은 환자 치료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현지 의료체계를 교란시킨 경우도 있었다. 의료봉사단이 안과수술을 무료로 시행하자 해당 지역 안과 전공의가 급감해 안과 진료 공백이 발생한 것이다. 언어와 질병의 양상이 다른 해외의 경우 단기간 진료 활동으로 해당지역의 보건상황을 개선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기존 의료시설에 대한 불신으로 주민 건강을 악화시킬 수 있었다. 국가 행정체계나 치안이 좋지 않은 국가에서는 지원 물품이나 약품이 주민들에게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일부 지역은 여러 단체에서 경쟁적으로 의료봉사를 하면서 중복되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최근 해외 의료봉사가 필요한 곳에 적절하게 지원될 수 있도록 봉사단체들의 연대와 협조가 시작되고 있다.

한국 전쟁 이후 1950년대 중반 미소 냉전으로 체제경쟁이 시작되면서 미국 해외 원조 부서는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 원조를 위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은 한국 역시 지원 대상국가로 선정됐다. 미국 정부는 한국의 대학교수를 미국으로 초청해서 연수한 뒤에 다시 한국으로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시행하기로 했다. 미국 중부 미네소타대학교가 한국과 협력하는 대학으로 선정됐고, 1955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등에서 젊은 교수 226명이 미네소타로 연수 혜택을 받았다. 미네소타 프로젝트로 불리는 이 계획에는 한타바이러스로 유명한 이호왕 교수 등 한국 의료와 과학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교수들이 많이 포함됐다. 봉사가 아닌 지원으로 한국 의료 발전에 큰 도움이 된 것이다.

의료 봉사도 현지 의료 역량을 증가시킨다면 지역 주민들의 건강을 돌보는데 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봉사 활동도 시대와 상황에 따라서 변화한다. 우리 용인지역도 1955년 무의면이 5개나 있었다. 과거 보건소와 보건지소가 의료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했으나,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의료기관들이 모든 읍면에 위치하고 있다. 보건소, 보건지소의 역할이 바뀌어야 할 시기다. 최근 코로나19로 공공 보건영역이 중요하게 생각되고 있다. 특히 감염관리와 방역에 대한 용인시민의 요구가 많아지고 있다. 1차 의료 활동에 공공의료가 동원된다면 코로나19 대응 역량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21세기 용인특례시에는 새로운 방식의 접근이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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