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 문화유산 이야기-기흥구 보정동 고군분

고구려·백제·신라 각축전 벌인 중요지역 흔적

사적 제500호로 지정된 보정동 고군분이 있는 기흥구 보정동 삼막골 마을은 삼국시대 당시 한경유역을 놓고 경쟁이 이어질만큼 전략적 요충지로 다양한 유적들이 나와 '고대사 연구의 보물창고'로 불린다.

옛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 가면 마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고분을 발견할 수 있다. 높은 건물을 찾기 힘든 경주에선 고분이 제법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해주며 한 폭의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과거 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도 하다. 이런 고분을 대단지 아파트와 넓은 도로가 펼쳐진 경기 용인시 기흥구 보정동에서 만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수십 번 다닌 곳인데 보정동 고분군 주소를 몇 번이고 들여다봐도 어디쯤인지 도통 감이 안 왔다. 삼막곡 터널을 지나 바로 우회전 하니 드넓은 곳에 여러 개의 고분이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분과 가까워지니 검정색 비석으로 만든 ‘용인 보정동 고분군’ 표지석이 눈에 띄었다. 

그토록 복잡하던 기흥구가 맞나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주변도로에는 여전히 차들이 쌩쌩 달리고 있는데, 이곳은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덩그러니 혼자 고분들 사이에 있으니 마치 타임머신 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다만 다소 아쉬운 것은 주차 공간이 넉넉지 않아 사람이 붐빌 때는 피하는 것이 좋을듯 싶다. 고분군 규모가 꽤 커 산책 겸 느긋하게 보는 것이 좋으니 평일에 방문하는 것을 추천한다. 

◇신라시대 생활 엿볼 수 있는 유물

보정동 고군분은 6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에 이르는 기간에 해당하는 고분으로 확인됐다.

거대한 고분을 보고 있으면 힘들게 왜 저렇게 큰 걸 만들었을까하는 생각부터 든다. 고분이 한두 개도 아니고 여러 개인데다가 일반 무덤보다 크기 때문에 엄청난 노동이 필요했을 것이다. 옛날 사람들은 거대한 고분을 만들기 위해 그토록 많은 노력과 공을 들였을까, 종교적 의미 때문이었을까 등 고분을 보면 꼬리에 꼬리를 물듯 여러 궁금증이 생긴다. 이에 대해 정확한 답변을 들을 순 없지만, 고분 안에는 당시 사람들이 사용한 물건부터 그림 등 다양한 흔적이 남아있어 당시 시대상을 유추할 수 있다. 보정동 고분군에도 발굴 작업을 통해 몇 가지의 유물이 발견된 바 있다. 2002년부터 시작된 보정동 소실봉(해발 188.8m)에 위치한 고분군 조사는 여러 차례 발굴 작업을 진행한 결과, 130여기에 이르는 고분을 확인했다. 이곳 고분을 살펴보면 흙을 쌓아올려 봉토를 만들고 끝 부분에 둘레돌을 두른 게 신라 고분 특징을 그대로 갖고 있다. 특히 고고학자들은 이 안에서 발견된 긴목항아리, 뚜겅굽다리접시, 짧은목항아리 등의 유물을 통해 6세기 중반 이후에 만든 고분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어 7세기 말부터 8세기 전반 고분 특징을 가진 돌덧널무덤과 돌방무덤 등 총 27기의 고분도 확인됨에 따라 수세기 동안 기흥구 일대에 많은 삼국시대 사람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무덤 특징인 앞트기식돌방무덤이 가장 많이 발견 됐고 작은 구덩식돌넛무덤 6개, 연도가 달린 굴식돌방무덤 1개, 다양한 토기가 발견된 바 있다. 8세기 이후의 통일신라 무덤 특징도 발견됐다. 당시 통일신라는 앞트기식돌방무덤으로 제작했는데, 보정동 고분군도 이같은 방식으로 제작된 것이다. 직사각형의 평면 모양 바닥을 만들었고 시신을 추가로 매장한 흔적이 확인되기도 했다. 

더불어 2017년 이곳 일대에서 발견된 뚜껑이 있는 그릇(유개고배), 항아리 모양 토기(토기호), 쇠칼 등 15점의 유물과 2기의 석실분(돌을 쌓아 방처럼 만든 무덤) 등을 봤을 때 활발한 도시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같은 유물은 삼국의 통일 과정에 대해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아, 2009년 6월 24일 보정동 고분군은 사적 제500호로 지정됐다. 

이처럼 역사적 가치가 있는 유적이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 고분을 본다면 성인키 만한 압도적인 크기의 무덤으로만 생각될 것이다. 필자 역시 옛 무덤이라는 단순한 의미의 고분에 대해서만 알았지 시대별 특징까지 알진 못했다. 이에 보정동 고분군을 중심으로 마북동, 할미산성 인근까지 삼국시대~조선 시대상을 담은 파노라마 안내판이 한 쪽에 마련돼 있다. 고분군 입구 ‘용인 보정동 고분군’ 비석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화살표 표지가 보인다. 그 표지를 따라 2~3분가량 앞으로 직진하면 다시 10여기 되는 고분들이 모여 있는 고분군이 있다.

고분들 가운데 유물이 발견된 고분에는 투명 아크릴 창문을 설치해 내부도 볼 수 있게끔 만들어 놨다. 안내판에는 초등학생도 금세 이해할 수 있게끔 발굴된 토기와 그릇 등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돼 있다. 이어 파노라마 안내판에는 보정동부터 수도권고속철도 구간, 마북동, 언남동 일대에서 발굴된 여러 시대 유적들을 표시해놔 시대적 흐름을 쉽게 볼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뚜렷한 존재감 용인 

보정동 고분군에는 130여기의 고분이 있다. 104호분 발굴 당시 모습

처인구 곳곳에 있는 선돌 등을 통해 용인은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한 곳임을 알 수 있는 가운데, 용인은 삼국시대부터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삼국 중 백제가 용인을 처음 차지함에 따라 기흥 구갈, 상갈동, 보정동, 마북 등에서 발견된 주거지·무덤 등에서는 백제 특징이 발견됐다. 이어 보정동 고분군이 만들어진 6세기 중반부터는 신라가 한강 유역으로 진출함으로써 용인도 신라 일부가 됐다. 보정동 뿐만 아니라 마북, 언남 등에도 신라시대 고분이 발견됐다. 이같은 고분군 입지를 통해 용인이 행정·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신라는 용인을 확보함으로써 고구려, 백제와 영토 확장 경쟁에서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보정동 고분군과 함께 <본지 1055호>에서 소개한 할미산성은 신라가 용인지역에 진출해 축조한 대표적인 유적으로 용인이 신라에 속해있었음을 증명해주는 대목이다. 이처럼 용인은 오래전부터 존재감 있는 곳이었다. 용인 역사를 보니 용인시민으로서 뿌듯하고 용인에 대한 애정이 샘솟는 기분이었다. 이에 시는 2016년 기흥구 보정동 산121번지 일대 1만9890㎡ 부지에 총 38억원을 들여 2020년까지 전망데크와 야외체험학습장을 설치해 역사문화공원으로 정비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2021년도가 됐지만 아직 문화공원으로 조성하진 못했다.
 

보정동 고분군 발굴 당시 모습.

폭설이 내리기 전날인 5일 보정동 고분군에 가보니 고분 끝자락에 테크 공사를 하고 있었고 이 또한 아직 완공 전이었다. 인근 주민들을 비롯해 역사에 관심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보다 보정동 고분군 보존과 더불어 역사문화공원에 대해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이라면 더 많은 시민이 알 수 있게 하는 것도 시의 몫이다.

용인이 오래전부터 삶의 터전이자 중요한 요충지였음을 알게 된다면 용인시민으로서 자부심도 느끼고 용인에 애정도 더 느껴질 테니 말이다. 보정동 고분군은 높은 지대에 위치해 있다 보니, 용인 일대가 한 눈에 들어온다. 느긋한 고분 사이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용인을 감상해보는 것도 잊지 못할 광경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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