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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귀비와 혈압약

기사승인 2020.09.03  10:3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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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에는 양귀비꽃이 피기 전에 대나무 침으로 십여 곳을 찔러 구멍을 내면 진액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그 진액을 긁어서 햇볕에 말려 아편을 만들 수 있으며, 진통제와 설사제로 사용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아편은 환각 작용 뿐 아니라 복통, 설사에도 효과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기에 고대 동·서양에서 귀중한 의약품으로 취급됐다. 마약을 의약품으로 생각했다니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놀라운 일이다.

약재로 취급된 양귀비 진액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으로 양비귀 하나하나에 칼로 상처를 내어 수액을 채집하는 방법은 굉장히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고 고된 일이었다. 16세기 이후 서구세력이 확장되면서 노예들을 이용한 사탕수수 등의 작물을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비싼 가격으로 팔수 있는 아편은 매력적인 제품이었다. 노예들의 노동력을 이용해 대규모로 아편을 생산했다. 무역량이 증가하면서 중독자들도 급격하게 늘어났다. 아편은 사회문제 뿐 아니라 국가 분쟁으로 이어지면서 1840년 아편전쟁이 벌어졌다.

아편에 대한 연구가 진행됐고 효과를 내는 성분을 찾아내려는 여러 과학자들의 노력이 있었으나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진짜 아편의 순수 물질은 독일의 한 실습생에 의해 발견됐다. 1817년 약국에서 조수로 일하던 제릐튀르너는 수 년 동안 아편을 알코올과 염기성 액체에 녹이는 실험을 했다. 마침내 하얀색 결정을 얻게 됐다. 어떤 효과를 가지는지 알기 위해서 직접 먹어본 제릐튀르너는 극도의 환각을 경험했으며, 이 물질이 아편의 핵심 성분인 것을 확신했다. 하얀 결정을 그리스 신화 꿈의 신 ‘모르페우스’의 이름을 붙여 모르피움이라고 붙였다. 모르핀, 아편의 핵심 성분이자 마약이다. 아편에서 모르핀의 비중은 전체의 12%에 불과했다. 양귀비 수액에는 모르핀 이외에도 다양한 성분들이 있었다.

1848년 영국 대학교에서 화학을 공부하고 있던 독일 유학생 머크는 아편에서 모르핀을 추출한 뒤 실험실을 정리하고 있었다. 아편을 추출한 뒤 남은 물질들을 버리면서 ‘무엇이 남아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 한 번 더 성분 분석을 시도했다. 남은 찌꺼기에서 근육을 느슨하게 만들어 주는 성분이 분리됐다. 머크는 양귀비의 학술 명칭과 비슷하게 ‘파파베린’이라고 붙였다. 파파베린은 특히 위장관 근육 이완 효과가 있었는데, 심한 경련성 복통을 해결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파파베린은 위장약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머크와 경쟁하던 다른 제약사들도 특허를 피하기 위해 화학 구조식을 변환시켜 새로운 의약품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1964년 독일의 한 제약회사에서 파파베린의 구조를 약간 바꾼 물질 하나를 개발하고 ‘베라파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런데 베라파밀은 위장 근육보다 심장근육에 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심박수와 혈압이 떨어진 것이다. 배 아픈 약을 먹는데 심장 문제가 발생하면 의약품으로 활용가치가 없는 것이었다. 개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개발진 중 한 명이 대학에서 심장생리를 연구하고 있었고 자문을 구했다. 의뢰를 받은 플레켄슈타인 교수는 마침 칼슘과 근육수축 관련성을 연구하고 있었다. 칼슘은 근육수축에 중요한 요소였는데, 이 물질이 칼슘의 역할을 방해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베라파밀의 심장 박동수를 떨어뜨리는 효과는 오히려 협심증 환자에게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주목을 받게 됐다. 베라파밀의 성공은 경쟁사였던 바이엘사에 영향을 줬다. 바이엘에서도 비슷한 물질을 개발하고 있었다. 천식, 협심증 치료제로 사용되던 산미나리에서 켈린이라는 성분을 추출해 새로운 물질을 개발하고 있었는데, 의도하지 않게 혈압을 떨어뜨리는 부작용이 있어 제품 발매를 주저하고 있었다. 

바이엘은 새로운 물질을 플레켄슈타인에게 보내 확인을 부탁했고, 베라파밀과 똑같이 근육의 칼슘 작용을 방해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바이엘은 새로운 제품이 혈압약으로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아달라트’라는 이름으로 판매하기 시작했다. 아달라트는 기존에 사용되던 혈압약 베타 차단제와 달리 정상 이하로 혈압이 잘 떨어지지 않는 장점이 밝혀지면서 혈압치료제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이후 작용시간이 길어진 암로디핀이 1982년 개발되면서 화이자에서 노바스크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 고혈압 환자에게 처방됐다. 

양귀비나 산미나리에서 혈압약 개발이 시작됐다고 해도 양귀비나 산미나리를 혈압약으로 사용할 수는 없다. 양비귀는 잘 알려진 마약이며, 산미나리 역시 켈린 이외 다양한 성분들이 함유돼있다. 전통 약재들은 여러 성분들이 함유돼 있으며 그 성분을 분석해 정제하고 안전하게 만든 것이 현대 의약품이다. 특히 수십 년간 복용하는 혈압약은 안정성에 민감해 미세한 문제점이 발견돼도 판매가 금지되기도 한다. 양귀비는 미세한 정도가 아니라 아주 분명한 마약 성분이 함유돼 있으므로 판매 유통이 금지됐다. 전통 약재들 역시 여러 성분이 복합돼 있기 때문에 많은 주의가 필요하나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관대하게 유통되고 있어 우려스러운 점이 많다. 혈압약을 장기간 복용해야 한다는 걱정으로 천연물질을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혈압 조절을 위해 가장 좋고 안전한 방법은 복합돼 있고 확인되지 않은 천연물질이 아닌 정제되고 검증된 혈압약을 복용하는 것이다. 

이동훈(서울새로운내과원장) webmaster@yongin21.co.kr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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