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시간에게 어렵게 허락을 받아 경안천을 걸었다. 7월 중순이어서 그런지 지난달보다 천지 모두 풍성해져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을 만들어 기른다는 신(?)의 조화에 위력인지 모른다. 멀고 가까운 산은 짙푸른 비단 바다다. 논의 가냘픈 모도 이젠 식구를 늘려서 논바닥을 가득 메우고 있다. 걷는 길 옆 뚝도 푸르름 일색이다. 

일찍이 누군가 말했다는 ‘만산이 홍엽이 아니라 천지가 만청(滿靑)’이다. 그것은 겨울을 지나 다시 살아난 뭇 생명들은 어제의 잎 티움에 이어 꽃 피워 열매를 맺는 일생을 보람차게 보내기 위한 부산함이 눈과 귀에도 들려오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변화는 모두 천지를 지배하고 있는 신의 섭리라 생각하며 걷다가 솟아난 돌부리에 채여 정신이 내 발 앞에 와서 멈춘다.

시계를 본다. 많이 걸은 탓인지 등이 끈적이나 싶더니 이마도 끈적댄다. 이어 땀방울이 연신 안경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 하얀 벽이 보이는 모텔 옆이다. 장마철로 들어섰다고 해서 오르내리던 비구름도 오늘은 멀리 남쪽으로 날아가고 산과 들을 온통 독차지한 7월의 땡볕이 사정없이 머리로 등으로 쏘아 박힌다. 하긴 걸어온 만큼 볕 쏘임을 받았으니 내 육신도 보답하는 셈치고 땀으로나마 털어 뱉어낸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큰 뜻이기에 감사하다고 해야 할지. 

흐르는 땀을 닦아내면서 계속 걷다보니 제대로 이름 몰라 멋대로 붙여본 연못이 3개 연달아 붙어 있는 삼지연(三池淵)? 옆이다. 햇볕에 비를 맞고 훌쩍 자란 갈대, 왕굴, 부들에 노랑꽃 창포, 정수한다는 고랭이, 붉은 꽃피는 수련에 꽃창포는 수질개선의 첨병이란다. 이렇게 흐드러지게 자란 화초 길을 걷다 보니 마치 어느 수상공원에 온 듯한데 바로 대 여섯 걸음 앞에 꿈틀거리는 물체가 있다. 다가서 보니 제집을 벗어난 길 잃은 지렁이다. 무섭게 이글대는 칠월의 땡볕으로 한껏 달궈진 시멘트 포장길 위에 길을 잘못 든 듯하다. 제집인 진흙속이 아니기에 꼼작도 못한 채 거칠고 달궈진 포장길 위에서 타들어가 죽기 직전이다. 온몸을 S자 모양으로 꼬고 머리를 들어 흔들어 대나 몸은 조금도 움직여주지 않는다.

“너도 한 세상을 살아보려고? 물 밖 세상 알려고 나왔으나 길 잘못 들어 궤도를 이탈했으니 힘들게 되었구나! 잘 알지 못하면서…” 하고 대답 못 들을 말을 뒤로 두고 발을 옮겼다. 계속 걸으면서도 마음은 그쪽으로 쏠렸다. 얼마 뒤 목표점에 도착. 등 없는 벤치에서 쉬면서도 마음 한 쪽에는 지렁이의 운명에 마음이 쓰였다. “그 길을 가로 질러 다시 제집으로 찾아 갔을까? 그때 집어서 물기 있는 풀 속에 넣어 피서라도 시킬 걸” 하는 실수가 후회로 바뀐다. 아는 사실로는 이 지렁이는 강태공들의 낚시 밥은 될지언정 우리 인간에게 크게 해를 주지 않는다는데 힘없는 미물인 네가 살기 위해 꿈틀거리는 몸부림을 못 본척했으니 모든 것을 사랑하라는 박애 정신을 모르는 비정한 육체덩어리 일뿐이라고 자괴해본다. 

그 다음이 궁금해 빨리 그곳에 가니 예상대로 지렁이에게 재변이 찾아와 있었다. 하늘을 나는 새가 아닌 개미떼에게 들켜 육신이 갈기갈기 찢겨 그 형태마저 찾을 수 없다. 그토록 살려고 머리 들며 안간힘 쓰던 흔적조차 찾을 길 없다. “이럴 때 길 잃은 지렁이를 처음 보았을 때 필자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어떻게 대처 했을까?” 하는 필자의 바보스러운 생각이 필자를 다시 바보로 만들어 줬다. 

지금은 대서가 지난 한여름. 산, 들, 물속에서 각기 몸 키우고 때로는 닥쳐올 겨울 채비와 다음해를 위해서도 비축할 거리를 챙기기 바쁠 시기다. 전에 읽었던 <생의 한계>란 글 ‘생령들의 일생의 삶이라는 ’한평생‘ ’한살이‘란 제 마음대로는 안 되는 법. 그것은 생령 자체의 자연사가 아니면 변고로 생의 한계를 맞지만, 자기 의사가 아닌 외부로부터 받는 공격으로 한계가 침탈당하기도 한다는 것, 이로 인해 신에게서 배정(?) 받은대로 일생을 마무리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내용으로 능동(생령 자체)과 수동(외부 세력)을 챙겨 깊이 새겨 볼만한 글이다. 

어쨌든 지렁이의 최후를 아내에게 말하니 “아무리 하찮은 미물이라도 환경이 바뀌어 움직이지 못해 도와주었더라면 어디선가 고마운 아저씨라고 칭송 받았을 것인데 안타깝네요” 하고 필자의 비정함을 꼬집었다. 어제 병상에서 만난 S회장의 백납 빛 얼굴이 글 위에 얼비쳐 보임은 무엇 때문일까? 황혼이란 두 글자가 풀어 줄지 모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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