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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욱 지사 “우리 형제는 독립전쟁 포로···죄인대우 부당”

기사승인 2020.06.10  18:1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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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술로 보는 ‘2대 3부자 독립운동과 삶의 이야기

홍종욱 지사 손자 홍민표(65.오른쪽)씨와 홍종엽 지사 손자 홍진표(66)씨가 소장 자료를 살피고 있다.

독립운동 관련자의 구술자료는 흔치 않다. 특히 본인의 이름으로 직접 남기는 경우는 더 귀하다. 다행스럽게도 용인 독립운동 연구에서 미쳐 몰랐던 한 인물에 대한 최근 구술자료가 화제다. 1965년 홍종욱 지사의 <국사편찬자료-3.1운동 당시 지방시위 운동 체험>이란 표지의 구술기록이다. 

소장자 홍민표(65‧용인시 처인구 포곡읍 금어리)씨는 홍재설 지사의 증손이자 홍종욱 지사의 직계종손이다. 그에 따르면 해당 구술자료는 실제 홍종욱 지사가 직접 쓴 것이기보단 그의 아들 홍순혁(1924~1988)씨가 구술을 그대로 옮겨 쓴 것이라고 기억한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홍순혁)가 할아버님 옆에 갱지를 펴놓고 무릎을 꿇고 앉아 부르시는 대로 적었다. 특이한 상황이어서 옆에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봤다”는 것이다. 

<체험>기록에선 용인 포곡 금어리 만세운동에 대해 구체적인 내용이 빠져있다. 실제 홍종욱(1893~1967) 지사와 홍종엽(1899~1983) 지사 두 형제가 독립운동 유공자로 선정된 것은 포곡면 금어리 1919년 3월 28일 시위주동 사실 때문이다. 당시 홍종욱(27)과 6살 터울의 차남 홍종엽(21)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주민 200여 명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포곡면 금어리에서 양지면 대대리까지 돌며 조선독립만세를 연호했다. 오전 7시 삼계리 주민들을 이끈 권종목이 홍씨 형제가 사는 금어리에서 합류해 조선독립만세를 외쳤다. 

홍재설의 두 아들 홍종욱과 종엽은 권종목과 더불어 포곡면 만세운동을 주동한 혐의로 체포됐다. 홍종욱은 용인 헌병대에 체포되어 ‘옷이 피걸레가 될 정도'’로 모진 고문을 당했다. 10개월 형 만기 출소 후 '만세주동자'라는 낙인이 찍혀 일경과 친일파의 괴롭힘에 시달려 사실상 경제활동에 나설 수 없을 정도였다.
 

3.1만세운동 100주년에 받은 홍재설 지사 훈장증

형과 함께 체포된 홍종엽도 일제의 고문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그들의 심문에 응했다. 두 형제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홍종욱은 3년, 홍종엽은 징역 10개월을 각각 언도받았다.
대한제국 당시 큰 벼슬을 했고 부유했던 증조부와 조부 형제가 용인에 정착하게 된 동기는 뭘까. 이에 대해 홍민표 씨는 “증조부의 전라도 조도 귀양살이로 인해 가세가 기운 가운데 증조모는 친정이 있는 용인 땅 금어리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후손들의 고향이 용인이 된 것은 바로 일제에 맞선 선대들의 독립운동과 그로 인한 궁핍을 피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러나 종손가의 가난은 초근목피로 연명할 정도였던 것으로 홍민표 씨는 기억한다. 

홍종욱 지사가 스스로 밝히는 3.1만세운동의 기록 <3.1운동 당시 지방시위 운동 체험>. 한문과 한글 혼용체로 쓰여진 구술기록을 거의 그대로 옮겨 사료적 가치는 물론 독자들로 하여금 생생한 당시를 느낄 수 있도록 싣는다.     

문교부에서 독립운동사 겸 3.1운동사를 편찬함에 제(際)하여 우리 고천국민학교 교장선생님으로부터 이 일에 관하여 경험사 또는 견문록을 적어오라 하시기로 대강을 기술하거니와 그간 여러 성상(星霜)이 천역(遷易-바뀌어 달라짐)되었을 뿐만 아니라 병구노물(病軀老物)이 선망후실(先忘後失-자꾸 잊어버리기를 잘함) 과다하여 견문 경험사를 서술하지 못하니 그거나마 서적편찬과 휘효(徽効)를 나타내게 될는지 하여간 생각나는대로 기재할 따름이로다. 

# 좋은 이웃 희망 사라지자 배일투쟁 노선 변경
을사5조약 당시는 필자가 14세 되던 해이다. 일인(日人)의 침략이 점점 더 심해져(거거익심,去去益甚)하야 가위(可謂) 차청입실(借廳入室-가만히 앉아서 고기잡이의 공을 거둠) 격으로 초차(初次) 우호결의 또는 통상조약에서 보호조약까지 맺게 되어 외교, 행정, 재산권 등 전부 탈취당하니 우리 국가민족은 실권없는 단체요, 정신없는 허수아비가 되었다. 

그때 나의 선친께서는 선전관(宣傳官)으로 재직 중 나라가 망하게 된 것을 통분히 생각하시고 벼슬을 내놓으시고 애국단체에 가맹하시어 구국운동을 해 보시려고 활동하셨는데 처음 입회하신 단체는 신궁봉경회(神宮奉敬會)이었다. 목적은 한일양국이 끝까지 상지(相支)를 하다가는 결국 두 나라는 모두 피폐되어 방휼지세에 좌수어인지공(座受漁人之功)이 될 것이므로 동양평화를 염려하여 좋은 이웃이 되어 인우호의(隣佑好誼)가 되기를 희망하고, 일인 고천수(高千穗)라는 자를 회장으로 추대하고 회명까지 일한담락회(日韓湛樂會)라고 개칭하였으나, 일인 중 인물이 없고 당장의 욕심만 채우려는 동양평화는 문제시하지 않고 착취에만 혈안에 되어 덤벼드니 대사가 거의(去矣)라. 이때부터는 노선을 변경하여 정면충돌하게 된 것이다. 

# 아버지 홍재설, 이완용 가옥 방화로 15년 유배형을 받다
동우회라 회명을 고치고 회장에 이윤용,  김가진을 2차에 걸쳐 추대해 보았으나 별무신통(別無神通-결과나 효과 따위가 그다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 없음) 이므로 제3대로 애국지사 전 한성판사(漢城判事) 윤이병씨를 추대하고 선친이 총무직을 담당하여 애국 겸 배일운동을 전개해 나가던 중 회원 중 자원자로 결사대를 조직하여 광무황제를 인질로 일본에 모셔가게 된 것을 결사대원 7천여 명이 덕수궁 대한문전 광장에 1주간 주야 계속 데모를 행한 바 결국 일본에 안모셔가겠다는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의 서약을 받아보고서야 동우회원은 만 7일만에 산회하였다. 그때 필자도 선친을 모시고 시종 머물렀다. 

그때 이완용을 잡으려 하였는데 미리 기미를 알고 동례로 피신하였고 그날 밤에 이완용 집에 방화, 가옥을 전소해 버렸다. 내란죄라는 죄명으로 경무청에 구금되어서 환산(丸山)이라는 일인경무관에게 혹독한 고문을 당하여서 몇 번이나 정신을 잃으셨으며 의복은 피걸레가 되었다. 

제1심에는 사형, 평리원(平理院) 고등재판에서 전라도 지도(智島)로 15년 유배되셨다가 경술년 합방시 풀려 오셨다. 필자는 부친이 배소로 행차하신 뒤 계속 학교에 다녔는데 학생들이 공부에 도움이 될 것을 목표로 배영회(培英會)라는 토론회를 조직하고 필자가 회장에 취임하였다. 경무총감 명석원이랑(明石元二郞)이 배영회를 해산하라고 하였으나 토론회는 지식확충 이외엔 다른 뜻이 없는 즉, 학교 문을 닫기까지는 회를 해산할 수 없다고 극구 반대하였다.

명석원이랑이 자동차를 태워 데려가 공갈위협으로 해산명령하였으나 응하지 않았더니 결국 강제로 회합을 못하게 하였다. 

# 현장에서 경험한 서울과 용인 3.1만세운동 
합방되던 해 여름 필자의 졸업식이 되었다. 이 졸업식장에 국기를 게양 못하게 하므로 이에 한거, 졸업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일경은 필자를 이때부터 요시찰인(要視察人)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안도산(도산 안창호)과 이월남(이상재) 윤치호 세분 선생님을 친절히 섬기고 늘 따라 다녔다. 

우리의 친우 중 외국에 가서 배일(排日)운동 한 분이 여럿이다. 외국간 사람과 서신왕래 없느냐 하며 5일 도리로 검문 또는 가택수색이 구찮았다. 예비검속도 툭하면 1년 동안 죄 없이 유치장 잠자리도 10여 차례 이상이다. 

서울에서 견디다 못하여 용인 시골집에 내려갔으나 용인헌병분대에서도 서울 못지않게 등살을 대며 가끔 헌병대에 데려가 며칠씩 재워 보낸다. 동국사락(東國史略), 음빙실문집(飮冰室文集) 등 서적 4~50권을 압수당하였다. 그러자 기미 2월 하순경에 일본에 유학 가 있는 줄만 알고 있던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형이 서울서 만나자는 연락을 사인통고 하였으므로 곧 올라가 상봉하고 삼일운동의 절차와 내용을 상세히 들어 알았다. 3월 1일 오전 8시경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 가서 손(병희) 선생 외 32위 대표와 그 외 모모선생과 일석에 회동하여 정오를 기하여 파고다공원에서 행사할 절차를 의론 후 각각 헤어졌다가 정오 전에 적정(的定)된 장소로 다시 회합하여 정각에 행사를 맞추고 대표 33인은 감옥행차를 자원하사 일 경관에 연행되었다. 

필자는 곧 시골로 내려와 시치미를 떼고 있었으나 3월 하순 용인헌병대 형사대가 필자의 집을 포위하고 부친과 나와 나의 아우 3부자(三父子)를 포박하여 용인헌병대에 연행, 3일간 협박 1차 고문을 끝낸 후 후 삼부자를 모두 서대문 감옥으로 송치되었다.

부친은 아무 사실이 확인되지 않았으므로 1개월 후 석방되셨고 내 아우는 용인지방 주동자이고 필자는 서울행사에 참여한 것으로 우리 형제는 재판에 넘겨져 나는 3개년, 아우는 1개년 형의 선고를 받았다. 

필자는 법정에서 판사에게 “우리는 독립전쟁에서 잡힌 포로이니 포로 취급할 것이지 죄인대우는 부당하다고 항거하였으나 기어코 죄수로 강제 집행되었다. 출옥 후 5년 후에 복권통지가 법원으로부터 본적지 면소에 전달되어 전과자의 오점은 문서상으로는 면하였으나 공무원, 기타 공직 채용에는 여전히 막히고 말았다. 

#‘만세죄인’이라 공직 못 나가…통일과 자주독립 염원
용인군수 이윤세 당시에 필자가 거주하는 면에 보통학교 교장 일인 다구안정(多口安政)이 나를 학무요원으로 추천하였다니 이윤세 군수가 만세죄인(萬歲罪人)로 채용을 반대하였다. 교장이 복권된 지 여러 해라고 부결서류를 다시 군수에게 보냈더니 이 군수 말이 복권되었을지라도 만세죄인을 학무원으로 선정할 것이야 없지 아니하냐 하여 학무요원도 못되었다. 무급 학무요원도 못할 신세가 되었으니 더구나 유급공무원이야 언감생심(焉敢生心) 이리오.

해방 전까지 51년 평생을 구사일생, 욕사 욕사(欲死 欲死) 지내오다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니 너무나 기쁘다. 그러나 호사다마라고 삼팔선이 가운데 그어지고 6.25동란이 일어나 국세민생(國勢民生)이 지금에 이르러 난마도탄(亂麻塗炭)을 면할 길은 망연하니 한심한 노릇이로다.

필자야 독립운동 하나 뚜렷히 나타난 것은 없으나 일생을 희생으로 바친 것만은 사실이고 볼 때 조모지년(朝暮之年)에 여일이 불우하니 통일된 나라는 못 보려니라. 속히 통일‧자주독립 되기를 원하는 마음 뿐 이로다. 

선친은 홍재설(洪在卨)씨 이신대 67세를 일기로 기축년에 별세. 나의 동생은 홍종엽(洪鍾熀), 당 67세, 용인에 거주. 본적은 용인군 용인면 고림리 754번지  나의 사상론 소감 일단을 위와 같이 개강 술회하노라.
1965년 4월 17일. 시흥군 의왕면 고천리 홍종욱(洪鍾煜) 당 74세.  

우상표 기자 spwoo@yongin21.co.kr

<저작권자 © 용인시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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