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백암농악을 전수해 오고 있는 처인구 백암면 차용성의 아들이다. 얼마 전 ‘농악인생 70년, 백암농악을 전국 최고로 이끌다’라는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아버지와 함께 백암농악이 전성기를 구가하던 시절 이야기를 나누면서 용인시 무형문화재 지정 필요성을 역설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기사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박상옥씨의 기고를 읽고 사실과 다른 황당하고 악의적인 내용이 있어 바로잡고자 이 글을 쓴다.

백암농악 판제의 진원은 이러하다. 백암면과 경계를 이루는 안성 일죽면 오방리에 상쇠 명인 이필재 선생이 계셨는데, 그 아래 김익수라는 분이 부쇠를 하고 있었다. 그 마을과 우리 마을은 청미천을 경계로 이웃하고 있었으니 자주 왕래하며 함께 풍물을 하곤 했다. 후에 이필재 명인은 뜻이 있어 가락을 접고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됐고, 후배인 김익수 선생이 상쇠를 맡게 됐는데 그분이 바로 우리 마을을 수시로 오가며 판제를 전수한 것이다. 당시 아버지는 상벅구를 맡았으며 단원들에게 벅구(농악에 쓰이는 작은 북, 소고라고도 함)를 지도했다.

용인이나 백암에서 벌어지는 농악대회에 출전하기 위해 마을 뒤편 잣나무 밭에서 횃불을 피워놓고 수일 밤을 지내면서 판제를 연습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안성의 김기복 선생이 장평리 팀을 이끌었다는 말은 전혀 근거 없는 주장이다. 당시 김기복씨는 인근 마을인 덜리미(가리산) 두레를 이끌었다.

시간이 흐르고 1970년대에 들어서 각 마을에 성행하던 농악이 점점 쇠퇴해지자 용인이나 이천, 안성, 음성 등지에서 열리는 농악대회에 나가기 위해 인근 마을 사람들과 연합해 패를 만들고 판을 짜게 됐는데, 아버지는 이때부터 상쇠를 맡게 됐다. 특히 1986년 용구문화제가 생겨 공설운동장(현 용인종합운동장)에서 씨름과 농악대회가 크게 열리면서 백암지역 대표로 유명수 선생의 뒤를 이어 아버지가 상쇠를 맡아 다년간 우승을 독차지했다. 

백암농악의 위용을 높여 용인을 대표하는 농악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것이다. 현재 진행되고 있는 백암판굿은 아버지가 이필재, 김익수 선생으로부터 배운 것이며 유명수 선생과는 무관하다. 오늘날까지 그 독특한 양식을 인정받아 2007년에는 용인대학교 전통문화연구소에서 문화관광부의 지원을 받아 백암농악 복원 및 재현 사업을 통해 발표회가 열렸고, <백암농악의 가락과 판굿 유형>이라는 책자도 발간했다. 

그럴진대, 박상옥씨의 글에서 아버지가 안성의 김기복 씨 아래서 벅구를 돌리며 장구를 쳤다는 기사를 보고 경악했다. 도대체 어떤 근거로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또 아버지는 백암에서 태어나 한 번도 고향을 떠나본 적이 없고, 우리 가락이 좋아서 평생 농악 외길을 걸어오신 분이다.

오히려 청년 시절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민요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분이 백암의 전통농악 분야를 논하며 왈가왈부하는 것은 이해할 수가 없다. 진정한 예술인이라면 후배로서 극진한 예우를 갖춤이 도리가 아닌가 싶다. 

또한, 흰바위농악단에서 단장을 맞고 있는 배○○씨에게 묻고 싶다. 현재 그쪽에서 연행되고 있는 판굿(판제유형)이 과연 유명수 선생에게 배운 것인지, 만일 아버지에게서 배운 판제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한 도용이다. 10년 이상 아버지 밑에서 부쇠를 하며 가락을 배웠다고 증언하는 아버지 말씀과 너무 상이하다.

우시장에서 농악을 하지 않았다는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다. 그 시절에는 우시장 위쪽으로 넓은 마당이 있어 씨름대회도 열리고 농악도 했다는 것을 지역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본인도 그 시절 씨름장에서 몇 시간씩 구경하던 기억, 애기씨름에 참여해 공책을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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