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랏빛 달콤한 향기를 내는 라일락은 동양에서 정향(丁香)이라 불리었는데, 향을 내는 목적이나 위장 질환의 치료제로 사용됐다. 고대 중국에서는 황제를 만나기 전 입 냄새를 없애기 위해 미리 정향을 입에 물었는데, 요즘으로 말하면 구강청결제나 은단과 같이 사용된 것이다. 동의보감에 기록된 정향은 비나 위가 차서 기가 조화롭지 못할 때, 즉 소화가 잘 안 되는 경우 사용했다.

서양에서도 라일락은 고대부터 오심, 구역감, 만성 피로, 위장 질환, 소변을 많이 보는 경우, 상처 치료 목적으로 사용됐다. 기원전 1500년경 이집트 파피루스에도 기록될 정도로 널리 사용됐다. 그러나 많은 양을 사용할 경우 시야가 흐려지거나 마비가 발생해 위험한 약초로 간주됐다. 

라일락은 중세 유럽의 목동들에게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됐다. 목동은 양들에게 라일락을 먹이려고 유도했는데, 양젖 생산을 증가시키는 효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라일락의 쓴맛을 본 양들은 아주 싫어했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라일락의 별명을 ‘산양의 후회’라고 붙였다.

19세기 근대 과학이 발전하면서 라일락에서 효능을 나타내는 물질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구아니딘과 유사한 성분이었는데, 유즙 분비를 촉진시키는 의미로 갈레진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 물질의 효과는 젖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뿐 아니라 호흡곤란을 유발시키며 폐출혈을 발생시키거나 마비를 일으키는 치명적인 부작용이 있었다. 실제 라일락을 많이 먹은 가축들이 갑작스럽게 죽기도 했다. 되새김질을 하는 양이나 소의 경우 한꺼번에 먹은 풀을 다시 게워내서 씹다가 독성 성분이 과량 섭취돼 급사한 것이다. 그렇게 되자 미국에서는 1891년 라일락을 독초로 분류했다.

라일락에서 발견된 구아니딘은 화약 원료로 사용되기도 했는데, 안정성이 높은 폭발물을 개발하기 위해 화학구조식을 변경하거나 응축시키는 실험들이 진행되고 있었다. 1878년 독일의 라스케는 구아니딘 등을 가열해 합성하는 실험을 하던 중 두 개가 합쳐진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냈다. 두 개라는 의미의 ‘바이(Bi)’라는 이름을 붙여서 ‘바이구아나이드’라고 불렀다. 같은 방법으로 여러 종류의 바이구아나이드 물질들이 만들어졌다. 

바이구아니이드 물질들의 특성 연구가 진행되던 중, 1918년 미국 예일대의 와타나베는 부갑선 환자에서 발생하는 근육 경련과 호흡곤란 증상이 구아나딘의 체내 효과와 유사한 것을 알게 됐다. 구아니딘을 주사한 토끼들은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호흡곤란과 마비 증상을 보였던 것이다. 경련을 일으키는 원인을 조사하던 중 혈액에서 당 농도가 감소한 것을 발견했다. 구아니딘 경련은 일종의 저혈당 쇼크 증상이었던 것이다. 와타나베의 발견은 구아니딘이 당뇨병 치료제로 활용될 수 있다는 영감을 줬다. 그러나 구아니딘 자체는 너무 독성이 강해 사용할 수 없었기에 독성을 약화시킨 물질이 개발됐고, 1926년 신탈린이라는 약품이 출시됐다.

당뇨병을 조절할 수 있는 알약의 출현은 많은 환자들에게 희망을 갖게 했다. 하지만 얼마 뒤 발견된 부작용으로 실망을 안겨줬다. 비슷한 시기에 개발된 인슐린은 먹는 당뇨약의 부족한 효능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다. 특히 인슐린이 분비되지 않는 소아 당뇨에서 환상적인 효과를 보여줬다. 결국 부작용도 많고 효과도 떨어지는 먹는 당뇨약은 시장에서 점차 사라지고 잊혀졌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다. 2차 세계대전 주축국 중 한 곳인 일본은 전선을 확대하면서 동남아시아와 태평양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말라리아 치료제였던 키나나무가 대량으로 재배되던 동남아시아가 일본에 점령되면서 미국을 비롯한 연합군은 군사 작전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치료제를 확보하지 못한 미군은 전투에 나서지 못하고 말라리아에 감염돼 후송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모기 퇴치 작전을 벌이기도 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기 어려웠다. 키나나무가 아닌 새로운 물질로 말라리아 치료제 개발이 시도됐고, 그 과정에서 구아니딘을 변형시킨 프로구아닐이라는 물질이 개발됐다. 다행히 프로구아닐은 말라리아 치료에 효과가 있었는데, 환자 치료 도중 혈당이 떨어지는 것이 발견됐다. 구아니딘 계열의 물질은 말라리아 뿐 아니라 인플루엔자 바이러스에도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프로구아닐을 변형시킨 ‘메트포르민’이라는 약품이 1949년 필리핀에서 독감 유행하자 치료제로 활용됐는데 역시 환자들의 혈당이 떨어졌다. 

메트포르민에 주목한 것은 프랑스의 아론 연구소였다. 인슐린은 강력했지만 저혈당 위험성이 있고 주사제라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메트포르민은 저혈당이 적게 발생하고 알약 형태로 복용이 간편했다. 1957년 당을 먹어 치운다는 의미의 글루코파지라는 메트포르민 약품이 시장에 출시됐고 당뇨병 환자들에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1920년대 부작용으로 실패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주의 깊은 관찰이 계속됐다. 메트포르민 이외에 몇 개의 비슷한 약품들이 개발됐으나 독성이 발견되면서 퇴장했다. 미국 FDA는 1995년에서야 메트포르민을 허가했다. 

메트포르민 제제는 저혈당 위험성이 낮고, 비용도 저렴했기에 당뇨병 환자의 1차 치료제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이 후 한국은 물론 전 세계에서 널리 보급되기 시작했다. 최근 싱가포르에서 메트포르민 제제에서 발암 물질 N-니트로소디메틸아민 성분이 검출돼 국내에서도 조사가 시작됐다. 

라일락, 한약재로 정향이라는 천연 재료에는 독성이 많아 실제 환자에 사용되기 어려웠다. 독성을 줄이고 안전성을 높인 메트포르민은 수십 년간 사용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확인하면서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안정성이 확보되었더라도 오래된 약은 구조 변형으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에 장기 처방보다 필요한 만큼만 구입해 복용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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