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서 배운 미술 감상 ‘호암미술관’

삼성그룹 창업자 고 이병철 전 회장의 호를 따 지은 호암미술관 모습

호암미술관으로 향하는 길.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도로 양 옆에 심은 가로수나 조경수는 계속 새 옷으로 갈아 입는다. 그래서인지 벚꽃 개나리 피는 봄에도, 빨간 단풍으로 물든 가을에도 호암미술관을 찾는 이들로 북적인다. 울긋불긋 단풍을 볼 수 있는 날이 그리 길지 않아서인지 평일 낮임에도 호암미술관에는 제법 사람들이 있었다.

평소 같으면 미술관을 향해 걷기 바빴을 텐데, 그날엔 저수지 옆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음걸이를 옮겼다. 그리고 주변을 여유 있게 둘러봤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너무 오랜만의 방문이었던 것일까. 직업상 사진 촬영을 위해 또는 야외 풍경을 보러 오곤 했지만, 미술관과 희원이라는 목적을 두고 온 게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고백하건대 1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이 때문인지, 바깥마당과 희원을 이어주는 ‘보화문’이 낯설었다. 습관처럼 카메라를 들었다. 보화문보다 뷰파인더 안의 보화문 너머 매림(그 곳이 매림인지 안내서를 보고 알았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호암미술관 2층 전시실 모습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여행을 즐기는 필자는 국내·외를 여행할 때면 현대화된 곳보다 원도심이나 골목이 있는 마을, 성이나 궁, 사찰(서원) 등을 즐겨 찾는다. 특히 문화유적지나 사찰을 찾을 때면 정원을 꼭 둘러본다. 정원에 대한 지식이 있어서가 아니라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건, 인공적으로 잘 꾸며놓았건 정원을 보는 즐거움 때문이다. 흔히 마음이 ‘힐링’되기 때문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듯하다. 

호암미술관은 귀한 미술작품이나 문화재를 감상하거나 알아가는 재미도 있지만, 호암미술관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정원을 보는 맛도 쏠쏠하다. 한국 전통정원을 재현한 ‘희원’이다. 희원은 1997년 유네스코 한국 문화유산의 해를 기념해 한국 전통정원을 재현하기 위해 조성됐다. 흔히 서구의 정원은 자연을 외부로부터 분리하기 위해 담장과 같은 경계를 만든다. 반면, 우리나라 정원은 자연을 구분하지 않고 공유한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한국의 전통정원은 자연의 순리를 근본으로 삼았고, 자연에 최소한의 손질만 해서 다듬었다. 일본의 사찰이나 궁 등을 보면 아주 잘 가꿔진 정원(흐트러짐이 없어 보이기까지 한다)을 보고 탄성을 자아낸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잔상이 그리 오래가지 가지 않았다. 인공적인 ‘미’ 때문이다. 한국의 전통정원을 보면 관상수는 심지 않았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르도록 했다. 인공적인 화려함 대신 자연의 편안함을 택한 것이다. 담양 소쇄원이 대표적이다.

전통정원에 담긴 철학을 되새기며

금동 신묘명 삼존불 입상(국보 86호)

한국 전통정원을 재현해 놓았다는 호암미술관 ‘희원’ 역시 자연스럽게 꾸며놓은 것이 특징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자연스러운 멋보다 조경의 멋에 더 가깝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가지 아쉬움은 앞산 벚나무들을 볼 수 있는 봄날 ‘주정(희원 너른 마당에 네모난 연못이 중심 정원)’, 연꽃이 만개한 법연지, 가을 국화 가득한 관음정, 담과 석양에 눈이 쌓인 겨울 풍경 등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정을 둘러싸고 있는 빨갛게 물든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아쉬움을 달래기에 충분했다. 한 가지 더. 호암정에서 바라보는 주정 경치도 놓치기 아까운 풍경 중 하나다.

희원에 대해 이렇게 설명된 글귀가 있다. ‘선조들은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 속의 여러 현상을 읽어내며 정원을 만들었으므로, 우리 전통 정원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그것과 나를 관련 짓는 것이다.’ 경치를 소유하는 것이 아닌 잠시 빌려서 즐기는 ‘차경’을 중요하게 여기는데, 호암정에서 바라보는 주정 풍경을 누려보는 것이야말로 이른바 ‘소확행’이 아닐까 싶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희원을 뒤로 하고 월대(밤이 되면 달빛을 비춘다고 한다)와 현묘탑(고려 초 고승 지광국사 해린의 유골을 안장한 부도인 현묘탑을 재현한 탑)을 지나 미술관으로 들어섰다. 호암미술관은 여느 박물관이나 미술관 등과 느낌이 사뭇 달랐다. 필자에겐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는데, 하나는 잘 관리된 외관이나 전시 작품 때문에 압도된 느낌이었다. 다른 하나는 무거운 공기 속에서 느끼는 반가움이었다. 아마도 교과서에서 배우거나 본 낯익은 작품 때문인 듯했다.

현대 회화부터 삼국시대 불교미술까지

분청사기 조화 절지문 편병

그래서인지 그간 박물관을 다니며 감상하던 시간보다 호암미술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짧았다. ‘시간의 축을 따라 현재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며 우리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자리하고 있는 의식주 생활의 흐름을 조망하고, 나아가 삶의 리듬에 활력을 불어넣은 세시풍속과 의례, 그리고 함께 즐기던 놀이와 예술을 만나는’ 시간 여행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는데 아쉽기만 했다. 

2층 전시실에는 선조들의 멋과 해학이 담긴 민화, 신앙을 바탕으로 한 불교미술, 생활 속 예술 도자기까지 학창시절 한 번쯤 교과서에서 봤을 법한 미술품과 문화재를 보는 재미가 있다. 궁중부터 일반 백성에 이르기까지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됐던 민화에 눈이 가다가도 발걸음을 조금만 옮기면 1400여년 전 연꽃 속에서 부처가 나오는 ‘연화화생’ 등이 새겨진 ‘금동 신묘명 삼존불 입상’이 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잡는다. 다양한 개성을 반영한 분청사기, 선비를 닮았다는 조선백자 등을 보고 있노라면 옛 선조들의 심미감에 절로 탄성이 나온다.
감흥의 여운을 뒤로 하고 미술관 2층 유리창 너머 가을 산을 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시인이 될 것 같았다. 밖을 보면 사색에 잠겨 있는 한 사람을 보면서 문득, “저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마저 들었다.
 

호암미술관과 전통정원 회원이 시작되는 곳이 보화문이다. 보화문 밖에서 바라본 매림 전경

호기심도 잠시,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갈 무렵 미술관을 나섰다. 바깥 풍경은 여전히 빨갛고 웃음소리 넘쳐났다. 십장생 문양을 새겨 놓은 경복궁 자경전 뒤에 있는 ‘꽃담’과 흡사하게 만들었다는 꽃담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쭉쭉 뻗어 있는 메타세콰이어 옆 단풍이 더 발갛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림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겐, 조선시대 대표적인 공예미술인 목가구 전시보다 대한민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김환기, 이규상, 이응노, 하종현 등 한국 추상미술의 궤적을 짚고 있는 ‘한국 추상미술의 여정’ 기획전을 추천한다. 평일 오후 두 차례(11월까지), 주말 오전과 오후 세 차례 전시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도 있으니 시간을 맞추면 더욱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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